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더러운 전쟁 (문단 편집) === 개요 === >'''우리는 모든 반란분자들을 죽일 것이며, 다음으로 그들의 협력자들을 죽일 것이다. 그 다음은 그들에게 동조하는 자들이며, 그 다음은 무관심한 자들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주저하는 모든 사람들을 죽일 것이다.'''(Primero mataremos a todos los subversivos, luego mataremos a sus colaboradores, después a sus simpatizantes, enseguida a aquellos que permanecen indiferentes y, finalmente, mataremos a los tímidos.) >---- >당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시장이던 이베리코 생장[* Ibérico Manuel Saint-Jean, 1922~2012. [[준장]] 계급의 군인이었으며, 시장 재임 시절에 여러 정치범 구금 시설을 관리했다.]이 1977년 5월에 한 연설에서 남긴 말. 1977년 5월 6일자 [[가디언지]]에 실렸다. 1970년대 [[아르헨티나]] 비델라 군사정권에서 [[좌익]] 및 [[페론주의]]자들을 상대로 벌인 [[백색테러]]. [[이사벨 페론]]의 실정에 불만을 품은 아르헨티나 군부세력은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육군 총사령관을 중심으로 1976년 3월 24일에 아르헨티나의 당시 정권에 불만을 품은 미국의 암묵적인 지원을 받아 [[1976년 아르헨티나 쿠데타|쿠데타]]를 일으켜 [[레이날도 비그노네]]가 물러난 1983년 12월 10일까지 총 4명의 군사 독재자가 7년 동안 집권했다.[* 그 중 5년 동안 집권한 비델라가 가장 오래 집권했고, 그 다음에 집권한 로베르토 에두아르도 비올라(Roberto Eduardo Viola, 1924~1994)는 건강 문제 때문에 [[레오폴도 갈티에리]]의 쿠데타로 9개월도 안 되어 쫓겨났으며, 이렇게 집권한 갈티에리는 [[포클랜드 전쟁]]을 일으켰다가 패전의 책임을 지고 집권한 지 반년도 안 되어 사임했고, 마지막 군사 독재자인 [[레이날도 비그노네]]는 1년 5개월 동안 집권한 후 물러났다.][* 사실 비올라와 갈티에리 사이에는 카를로스 라코스테(Carlos Lacoste, 1929~2004) 해군 중장이 10일간 임시 대통령을 역임했고, 갈티에리와 비그노네 사이에는 알프레도 생장(Alfredo Saint-Jean, 1926~1987, 상술한 이베리코 생장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육군 소장이 12일 동안 임시 대통령을 역임하며 '''[[군인 황제 시대|3년도 안되는 짧은 기간 동안 정확히 6명이 대통령직을 역임하는]]''' 혼란기가 왔다. 다만 라코스테와 생장은 집권 기간이 너무 짧은 나머지 정식 대통령으로 치지는 않는다.][* 참고로 이 쿠데타에는 '''[[네덜란드]]의 [[막시마 소레기에타 세루티|막시마 왕비]]의 아버지'''인 호르헤 소레기에타(Jorge Zorreguieta, 1928~2017)도 가담했는데, 소레기에타는 비델라 정권 하에서 농업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비델라와 달리 옥사하기는 커녕 오히려 2009년까지도 요직을 거치며 살아오다가 딸이 왕비가 된 모습을 본 후 2017년에 편안하게 죽었다.] 이들은 정권 안정을 위해 좌익들과 민주주의자들을 일소하고자 했고 그 일환으로 벌인 것이 이 '더러운 전쟁'이다. 당시 아르헨티나 군부가 자행한 만행들은 아예 '남미의 [[나치]]'라는 별명까지 붙게 만들 정도로 심각했다. 아르헨티나가 비델라를 포함한 군사 독재자들의 지배 하에 있던 1976년부터 1983년까지 단 7년 동안 공식적으로는 1만 2천명, 최대 수치로는 3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실종'[* 실제로 미 국무부의 기밀 해제된 1979년자 문서에 따르면 당시 아르헨티나에서는 확인된 것만 한 달에 55명, 즉 하루에 약 2명이 '실종'되었다고 한다.], 5만 명이 투옥되었고 고문당한 것으로 추정되며, 비델라 본인이 말년에 옥중 인터뷰에서 인정한 사망자만 해도 7000~9000명에 달했다.[* 기록에 따르면 사망자와 '실종자' 중 1만명 가량은 비델라에 반대하는 게릴라 단체와 연관된 사람들이었다고 하는데, 1977년을 기점으로 게릴라의 세력이 약화된 후에는 민간인들이 압도적인 비율로 희생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더러운 전쟁' 기간 동안 아르헨티나에서 납치, 고문, 살해 또는 실종된 사람들의 수는 불분명한데, 이는 군부가 인권탄압 피해자 명단 목록을 법원에 제공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시 아르헨티나 군부는 임금 인상을 요구한 노동조합 지도자, 평화주의자와 인권 단체 활동가들도 '공산주의자'나 '기독교와 서구 문명의 적'이라고 몰아가며 연행하고 고문했고, 심리학자와 사회학자들까지 '의심스러운 직업을 가졌다'는 이유로 잡아갔으며, 단지 연행자가 소장한 수첩에 이름이 적혀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잡혀간 사람도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